August 18th, 2017 Fri

[강원 원주시] 원주 8경

in Category 여행

원주시 문화관광 | http://tourism.wonju.go.kr/hb/tour/sub01_01_01

 제1경  

구룡사

아홉 바다의 용이 구름을 풀어 놓은 듯한 신령스러운 전설이 살아 있는 고찰


구룡사 이야기길

구룡사에는 이야기가 있다. 구룡사로 가기 위한 치악산 입구의 황장금표와 금강소나무부터 시작하여 계곡의 나무와 구룡사의 구석구석까지 천 년이 넘는 오랜 시간 동안 사람들과 함께한 만큼 구룡사로 가는 길목에는 이야깃거리들이 많다. 1,000m가 넘는 준봉들과 계곡이 많은 치악산은 자락자락이 넓고 깊어 산행로도 많고 입구도 많은데,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찾고 볼거리가 많은 곳이 구룡사지구다. 1400년의 역사를 간직한 구룡사는 풍수지리적으로 "천 년이 지난 신령스러운 거북이 연꽃을 토하고 있고, 영험한 아홉 바다의 구룡을 풀어 놓는 형상을 한 천하의 승지"라고 하여 서기 668년(신라 문무왕 8년) 의상대사에 의해 창건되었다. 오랜 역사만큼의 전설을 갖고 있는 구룡사 전설을 들어보자. 


전설이야기

   아홉 마리 용 전설

 명산인 치악산에 큰절을 세우고자 한 스님이 찾아 들었다. 지금의 구룡골에 접어들었는데 동편에는 시루봉을 쳐다보며 아늑한 협곡으로 되어있는 이곳 풍치의 아름다움은 가히 절경이었다. 그러나 명당을 골라 절을 세우려고 주변을 살펴본즉 대웅전을 앉혀야 할 자리가 꼭 연못이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스님은 그 연못을 메우려고 했다. 이때 이 연못 속에서는 아홉 마리의 용이 살고 있었는데 용들로서는 큰일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의 살 곳을 메우다니 그런 무자비한 일을 스님이 어떻게 할 수 있소?" 하고 항의 했다. 그러나 스님은 "존엄하신 부처님을 모시려면 너희들이 사는 연못이어야 하는데 어떡하겠나?" 하고 양보하려 들지 않았다. 스님과 용들은 메우겠다 못 메운다 한참 실갱이를 벌이다 용 쪽에서의 제의로 내기를 하여 이긴 쪽의 뜻에 따르기로 하였다.

용들은 먹구름을 불러 일으키며 하늘로 치솟으니 갑자기 뇌성벽력과 함께 장대 같은 소나기가 억수로 쏟아지는데 삽시간에 계곡이 넘쳐 스님이 서 있는 데까지 잠겨버렸다. 이와 같은 용의 재주를 미리 짐작하고 시루봉과 천지봉 사이에 배를 건너 매어 놓고 태연히 기다리고 있던 스님은 배위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용 쪽에서 볼 때는 어이없는 일이었다. 

 "그럼 이번에는 내가 한 수 부려볼까?" 

스님은 부적을 한 장 그려서 아홉 마리의 용이 살고 있는 연못 속에 집어 넣었다. 그러자 연못에서 김이 무럭무럭 오르더니 연못 물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용들은 견딜 수 없어 하늘로 달아났는데 그 중 눈먼 용 한마리가 달아나지 못하고 근처 연못으로 옮겨 앉았다. 스님은 예정대로 그 연못을 메우고 대웅전을 지음으로써 오늘의 구룡사가 들어 앉게 되었다.

구룡사에서 보면 동해를 향한 여덟 개의 골이 된 산봉우리를 볼 수 있는데 이것은 그때 여덟 마리의 용이 급히 도망치느라 골이 생긴 것이라 한다. 그래서 이 절을 아홉 마리의 용이 살던 곳이라 하여 "구룡사"라 했다 한다. 지금은 아홉구(九)대신 거북구(龜) 자를 쓰는데 이자를 바꾸게 된 연유에 대해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거북바위 전설

본래 구룡사는 스님들의 수양도장으로 세워졌으나 오랜 세월을 두고 흥망성쇠에 따른 곡절이 많았다. 이조에 들어서면서 치악산에서 나는 산나물은 대부분 궁중에서 쓰게 되어 구룡사 주지스님이 공납의 책임자 역할까지 하게 되었다. 좋거나 나쁘거나 구룡사 스님의 검사 하나로 통과되는지라 인근 사람들은 나물 값을 제대로 받기 위해 별도로 뇌물을 바치기도 했다. 견물생심이라 아무리 부처님 같은 스님이라 할지라도 여기엔 욕심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리하여 구룡사는 물질적으로 풍성하기는 하였으나 정신도장으로서는 몰락의 길을 걸었다. 

이럴 즈음 한 스님 이 찾아와 몰락한 이 절을 보고 개탄하면서 이 절이 흥하지 못하는 것은 금에 들어오는 입구에 있는 거북바위 때문이니 그 거북바위를 쪼개 없애면 좋을 것이라고 했다. 절에서는 그 스님의 말을 믿어 거북바위를 쪼개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그 후부터 찾아오는 신도도 더욱 적어지고 거찰로서의 명성은 점차 줄어들었다. 급기야는 절문을 닫아야 할 처지에 이르렀다. 이럴 때 어느 날 도승 한 분이 찾아왔다. "이 절이 왜 이렇게 몰락하는가 하면 그 이름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 하고 말했다. 

주지스님은 "그건 무슨 말씀이신지요?" 하고 물었다. 

 "본시 이 절은 절 입구를 지키고 있던 거북바위가 절운을 지켜왔는데 누가 그 바위를 두동강으로 잘라 혈맥을 끊어버렸으니 운이 막힌 것이오."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주지 스님은 재차 물었다. 그랬더니 그 도승은 거북을 다시 살린다는 뜻에서 절의 이름을 아홉구(九)에서 거북구(龜)자를 쓴 구룡사로 쓰기로 했다 한다.


보광루, 일주문, 부도… 있는 그대로가 유적이 된다.

구룡사 매표를 지나 구룡계곡을 따라 들어가면 황장금표와 굽이굽이 금송길이 펼쳐지는 구룡 테마 탐방로가 나온다. 다양한 곤충서식지와 나무이야기를 보며 원통문과 사리를 모신 부도탑을 지나 1km남짓한 숲 길을 걷다 보면 구룡사에 도착한다. 구룡사가는 길은 계곡도 아름답고 길도 경사가 없어 산책을 즐기며 걷기에도 그만이다. 사천왕문을 지나면 보광루와 대웅전 등의 경내의 모습이 보여진다.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절 내의 건물들은 대부분이 강원도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며, 정면5칸, 측면2칸의 이층누각의 보광루는 그 규모로도 고찰의 웅장함을 보여준다. 오래된 절들은 그 기운만으로도 마음을 평화롭게 해주는데, 구룡사 역시 산사에서 들리는 풍경소리만으로도 청량감을 느끼게 해준다. 마당에 자리잡은 미륵불의 인자한 미소에 마음까지 푸근해진다. 구룡사에서는 다양한 주제로 템플스테이도 진행을 하고 있으니 마음이 어지러울 때 산사에서 전통문화를 체험해 보는 것도 추천한다.

 제2경  

500년 강원도의 수부, 강원감영

강원도의 역사가 살아난다. 강원문화의 중심지, 강원감영


강원감영이야기

강원감영은 조선시대 강원도 관찰사가 직무를 보던 관청이다. 조선왕조는 1395년 강릉도와 교주도를 합하여 강원도라 하고, 강원도의 수부를 원주로 정하여 강원감영을 설치하였다. 강원감영의 건물들은 1592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으나. 1634년 원주목사 이배원이 재건하기 시작한 후, 여러 목사와 관찰사들이 계속 건설하였다. 

강원감영은 선화당을 비롯하여 포정루, 보선고, 내아, 비장청, 호저고 등 40여 동에 달하는 웅장한 모습으로 1395년부터 1895년까지 500년 간 강원도 역사창조의 중심역할을 하였으나, 1895년 조선 8도 제도를 23부 제도로 개편함에 따라 그 기능을 상실하였다.

1896년 이후 강원감영 건물은 원주 진위대 본부로 사용하였고, 1907년 진위대가 해산된 후에는 원주군청으로 사용되었다. 40여동의 화려한 건물로 이루어졌던 강원감영은 1895년 이후 대부분의 건물들은 없어지고 선화당을 비롯하여 포정루, 내아 등 몇 동의 건물만 남게 되었다. 

강원도와 원주시는 500년 강원도의 수부로서 강원도를 관할하였던 귀중한 문화 유산인 강원감영을 복원하기로 하고, 2000년부터 복원작업을 시작하여 2005년까지 선화당, 포정루, 중삼문, 내삼문, 내아, 행각 등 강원감영의 일부만을 복원하였다. 


강원감영의 재현

원주에 있는 강원감영은 다른 지역의 감영들이 여러 지역으로 이전했던 것과는 달리 조선왕조 500년동안 원주에만 있었다는 사실에서 다른 지역의 감영보다 더 큰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원주시에서는 강원감영의 역사적 중요성을 감안하여 995년부터 강원감영지를 도심 속 역사문화 사적공원으로 조성하기 위한 계획을 수립하고 정비복원 자료를 마련하기 위하여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사적공원 조성사업으로 선화당, 포정루에 대한 보수공사와 중삼문, 내삼문, 행각에 대한 복원공사를 실시함은 물론 내아를 해체 보수하는 등 강원감영의 일부를 복원, 2005년 8월 31일 일반인에게 개방하였다.


강원감영에는?

   포정루

포정루란 편액의 의미는 지방관의 어진정사가 잘 시행되는지 살펴보는 누각이라는 뜻이다. 포정루는 1750년대에 간행된 『여지도서』 '관찰영' 항목에 12칸이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1665년 관찰사의 집무실인 선화당을 창건하면서 강원감영의 문루로써 건립한 것으로 보인다. 포정루의 구조는 방형의 긴 초석 위에 민흘림기둥을 세운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으로 익공양식에 겹처마이며, 지붕의 옆면이 여덟 팔자의 모양을 하고 있는 팔작 지붕 건물이다. 1895년 강원감영이 폐지된 이후 원주진위대가 본부로 사용하였을 때에는 '포정루'라는 편액을 내리고 '선위루'라는 편액을 달았고, 1950년 한국전쟁이후에는 '강원감영문루'라는 편액을 달기도 했으며 1991년 포정루라는 편액을 달아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선화당

조선시대 강원감영의 본관 건물로 관찰사가 직무를 보던 곳이다. 선화당이라는 편액의 의미는 임금의 덕을 선양하고 백성을 교화하는 건물이라는 뜻이며, 관찰사는 이곳에서 행정, 농정, 조세, 재판 등의 업무를 수행하였다. 강원조관찰사의 집무실인 선화당은 1665년(현종6)에 이만영 관찰사가 창건하기 시작하여 1667년 에 이르러 후임 이후산 관찰사에 의해 31칸 규모로 축조되었고, 이후 1732년(영조8)에 이보혁 관찰사가 선화당 건물의 단청을 새로 하였다. 선화당은 1단의 화강석 장대석 기단 위에 정면 7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겹처마 건물로 익공계양식이다

   중삼문

강원감영의 정전인 선화당으로 들어가려면 포정문을 거쳐 중삼문을 지나고 내삼문을 통과해야 하는데, 이 문은 포정문을 들어가서 전면에 설치되어 있는 문이다. 기록에 의하면 강원감영의 중삼문은 5칸이었으며 강원감영지를 발굴할 때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문지가 발굴되어 2005년 6월 17일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복원하였다.

 제3경  

보은의 전설을 간직한, 상원사

은은한 종소리가 산하를 뒤덮다, 깊은 산에서 보은의 메아리가 울려 퍼지는 상원사


남대봉 자락에 자리잡은 상원사는?

상원사는 치악산 남쪽 남대봉 중턱의 해발 1,100m의 높은 곳에 위치한 사찰이다.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가 지었다는 설과 경순왕의 왕사였던 무착스님이 지었다는 설이 있다. 고려말 나옹스님에 의해 새롭게 지어졌으나 한국전쟁 당시 소실되었다. 1968년 다시 지어진 후, 1988년에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여 중창하였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과 심우당, 심검당, 범종각, 산신각 등이 있다. 높은 곳에 조성된 사찰답게 자연 지형에 맞게 배치되었다


은혜 갚은 꿩설화

상원사에는 은혜 갚은 꿩의 전설이 전해온다. 치악산 기슭에 수행이 깊은 승려가 있었는데, 어느 날 산길에서 큰 구렁이가 새끼를 품고 있는 꿩을 감아 죽이려는 것을 보고 지팡이로 구렁이를 쳐서 꿩을 구하였다. 그날 저녁 승려는 폐사가 되다시피 한 구룡사에 도착해서 잠이 들었다. 

한밤중에 승려는 가슴이 답답하여 눈을 떴는데, 구렁이 한 마리가 자신의 몸을 친친 감고 노려보며 "네가 나의 먹이를 먹지 못하게 했으니 대신 너라도 잡아먹어야겠다. 그러나 날이 새기 전에 이 산중에서 종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너를 살려주겠다"고 했다.

상원사에 가야만 종이 있는데 시간상 도저히 불가능하여 포기한 채 죽음을 기다리고 있을 때 종이 세 번 울려왔다. 구렁이는 기뻐하면서 "이것은 부처님의 뜻이므로 다시는 원한을 품지 않겠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승려가 상원사로 올라가보니 종루 밑에는 꿩과 새끼들이 피투성이가 된 채 죽어 있었다. 원래 가을 단풍 빛이 아름다워 붉을 적(赤)자를 써 적악산이라 불렀는데 꿩의 보은설화로 인해 꿩치(雉)자를 써서 치악산으로 바꿨다고 한다.


상원사 석탑 및 광배

대웅전 앞의 두 탑은 모두 2중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을 쌓은 것이다. 1971년 12월 16일에 유형문화재 제25호로 지정된 석탑으로 해발 1,100m 이상의 높은 高地에 사찰이 경영된 것과 이러한 높은 곳에 쌍탑이 있는 것은 특이한 것이다. 쌍탑은 많은 부분이 훼손되었으나 1964년에 거의 완전할 정도로 보수하여 보존되어 있다.

석탑 옆에 불상 뒤를 장식하던 광배와 불상을 받치던 대좌가 남아 있다. 광배에는 부처님의 머리와 몸에서 나오는 빛을 둥근 선으로 새기고, 그 밖으로 불꽃 무늬를 화려하게 조각하였다. 그 안에는 연꽃과 당초 무늬를 새겨 놓았다. 1964년에 우측 석탑을 보수할 때에 탑신에서 관음보살좌상·인왕상·아미타불립상·석가여래입상의 금동불 4구가 발견되었는데, 제작수법이 매우 우수하고 신라 때에 유행하던 수법과 같은 형식을 엿볼 수 있으며, 이 광배도 비슷한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대웅전

대웅전은 정면 3칸(8.4m)·측면 2칸(5.3m)의 겉처마 팔작지붕에 다포집이다. 법당의 불상은 새로 봉안한 것이고, 석가래와 기둥 등은 모두 정연하며 두공부에 용두(龍頭)조각을 배치하여 주목을 끈다. 근년의 건축물로는 드물게 보이는 질서 있는 건축물이다. 안쪽에는 비로자나불, 석가모니불, 노사나불 및 후불탱화, 지장탱화, 신중탱화를 모시고 있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나란히 쌍탑이 있는데, 이러한 쌍탑이 등장하는 시기는 대체적으로 삼국통일 이후로서 왕성한 국력에 의하여 전국도처에 유행하게 되었다. 이 석탑은 신라 석탑의 정형을 따른 2중기단 위에 3층옥개를 형성하였으며, 상부 상륜부는 둥글게 연꽃봉오리 모양을 새겨 일반 탑에서 보기 어려운 양식을 나타내고 있다.

 제4경  

자연의 신비로움, 치악산 비로봉

사계절 내내 그려놓은 듯한 풍광이 펼쳐지는 원주의 지붕


태백산맥의 줄기 치악산

태백산맥의 오대산에서 남서쪽으로 갈라진 차령산맥의 줄기인 원주의 명산 치악산 주봉인 비로봉(1,288m)을 중심으로 남으로 향로봉(1,043m), 북으로 매화산(1,084m), 삼봉(1,073m) 등의 1000m가 넘는 고봉들이 남북으로 웅장한 산군을 형성하고 있다. 남북으로 뻗은 능선들은 사이사이 깊은 계곡을 이루며 서쪽으로 급경사를 이루며 동쪽으로 완경사를 이룬다. 큰골·영원골·입석골·범골·사다리골·상원골·신막골·산성골 등 기암괴석과 층암절벽의 아름다운 골짜기가 있으며, 비로봉·남대봉·매화산·안봉·천지봉·투구봉·토끼봉·향로봉 등의 산봉과 입석대·세존대·신선대·아들바위·구룡폭포·세렴폭포·영원폭포 등의 명소가 산재하여 있다. 치악산에는 한때 76개에 달하는 크고 작은 사찰들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구룡사·상원사·석경사·국향사·보문사·입석사가 남아 불교 문화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색색이 아름다운 치악의 사계

치악산은 본래 단풍이 아름다워 적악산이라 불렸을 만큼 단풍이 유명하다. 가을만이 아니라 계절별로 곳곳에 매발톱꽃, 까실쑥부쟁이, 산부추, 뻐꾹나리, 천마, 개불알꽃, 백선, 곰취, 솜다리, 너도바람꽃, 도깨비부채, 금강제비꽃, 태백제비꽃, 고본, 박주가리, 미치광이풀, 금강초롱 등의 야생화들이 제각기 아름다움을 뽐내기도 한다. 이와 함께 봄에는 신록이, 여름에는 짙은 녹음이 넓은 산하를 뒤덮는다. 눈이 많이 오는 원주는 겨울이 되면 설국이 되는데 그 중에서도 치악산 상고대는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마치 나무들을 하얀 물감에 담갔다 놓은 듯 가지 끝까지 눈을 담아 얼어붙은 상고대는 바라보기만 해도 눈이 부신다. 날카로운 겨울바람이 한번 휩쓸고 지나가면 은가루를 뿌려놓은 듯 빛을 반짝이며 흩날리는 모습은 겨울 추위를 잊게 만드는 황홀경이다



험준한 산행의 끝, 비로봉 정상

치악산의 최고봉인 비로봉은 시루모양을 하고 있다고 해서 일명 시루봉이라고도 한다. 정상에 오르면 경기도, 강원도, 충청도까지 한눈에 조망 할 수 있다. 비로봉에 오르기 위해 가장 많이 이용하는 코스는 구룡탐방지원센터에서 출발하여 사다리병창, 또는 계곡길 코스이다. 사다리병창은 계단으로 되어있는 코스인데 가파르고 험해 치악산이 왜 악산인지 깨닫게 해주는 코스지만, 기암괴석 등의 아름다운 절경이 있다. 병창은 영서방언으로 벼랑, 절벽을 뜻하는 말이다. 계곡길은 계곡을 끼고 완만한 길을 따라 걸으면 되는데 크고 작은 계곡들이 만들어내는 자연의 신비로움이 감탄을 자아낸다.



치악산미륵불탑

치악산 비로봉에 세워진 돌탑은 원주에서 제과점을 운영하던 용창준(일명 용진수)이라는 사람이 꿈에 비로봉 정상에 3년안에 3기의 돌탑을 쌓으라는 신의 계시가 있어 혼자서 탑을 쌓았다고 한다. 1962년 9월 처음 쌓기 시작하여 1964년 5층으로된 돌탑을 모두 쌓았으나 1967년, 1972년에 알 수 없는 이유로 무너졌던 것을 용창준씨가 각각 그 해에 복원 하였다. 1994년이후 두 차례에 걸쳐 벼락을 맞아 무너진 것을 치악산국립공원 사무소가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미륵불탑 중 남쪽의 탑은 용왕탑, 중앙의 탑은 산신탑, 그리고 북쪽의 탑을 칠성탑이라고 한다. 납작한 정상에 사이 좋게 쌓여있는 세 개의 돌탑주위에서 대부분의 등산객들은 휴식과 식사를 한다. 멀리 내려다 보이는 치악산의 풍경과 시원하게 불어오는 산바람은 산행 동안 흘러내린 땀을 시원하게 닦아내 준다.

 제5경  

기암절벽과 맑은 물, 간현관광지

자연과 레포츠가 만나다, 몸과 마음이 살아 숨쉬는 천연 휴양지 간현


국민관광지 간현관광지

원주천과 삼산천이 합류하는 간현 협곡에 자리한 간현유원지는 주변에 간현야영지, 두몽폭포와 소금산 등의 관광지가 밀집해 있어 간현관광지로 사람들에게 사랑 받고 있다. 백사장과 수심이 얕은 맑은 강물 때문에 여름이면 피서객들이 즐겨 찾는다. 넓은 백사장을 사이로 건너편에는 간현암이 웅장하게 자리를 잡고 있고 반대쪽에는 캠핑을 할 수 있는 야영장이 있다. 야영장과 취사장이 잘 갖추어져 있어 가족, 단체 야영객들도 즐겨 찾는다. 해마다 여름이 되면 섬강축제가 열리는데 한여름의 더위를 씻어주는 즐거운 축제가 한바탕 펼쳐지기도 한다. 또 다른 즐길 거리로는 구 간현역에서 판대역을 오가는 코스로 최신의 설비를 갖춘 원주레일바이크(www.wjrailpark.com)가 운영되고 있다.


섬강 줄기 따라~

섬강이란 간현 앞강에서 약 3~4km 거슬러 올라가면 달내가 있고 그 강가에 두꺼비 모양을 한 바위가 있는데 그 모습을 따서 이름지은 것이다. 두꺼비섬(蟾) 자는 달월(月) 자와 같이 쓰이므로 그곳 강을 월천이라 불렀고, 이는 강 전체를 가리키는 이름으로 발전하면서 지금의 섬강에 이르렀다. 이 섬강은 태기산에서 발원하여 여러 골짜기의 물을 모아 강폭을 넓혀오다 간현에 이르러 협곡을 이루어 오형제바위와 같은 기암절벽을 만들었다. 


두몽폭포

간현관광지에서 서북쪽으로 약1km를 걸으면 주변의 수려한 경관과 거대한 암벽을 옆으로 20m의 시원한 물줄기가 쏟아지는 두몽폭포가 눈에 들어온다. 사시사철 물이 마르지 않아 언제든지 찾을 수 있으며 폭포 밑에는 직경 20m의 소가 있어 명경지수의 멋을 느낄 수 있으며 뒤로는 욕바위의 정상으로 향한다


소금산 암벽공원

등산로가 끝나 내려오면서 소금산교를 건너 기암절벽으로 둘러 쌓인 개미둥지골에 들어서면 암벽등반장소인 전국적인 명성을 가지는 간현암이 나온다 50-60m의 병풍같은 암벽중 두군데에 23개의 코스를 1993년 원주 클라이밍 협회에서 최초로 개발하여 99년 현재 다섯 군데에 50개의 코스가 개발되어 산을 좋아하는 산사람들의 암벽 타는 장소로 주말이면 전국에서 찾아오는 100여명정도의 산악인들로 원색의 물결을 이룬다.

 제6경  

호국영령의 성지, 영원산성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는 조상들의 얼이 깃든 성스러운 곳을 걷다


영원산성은?

영원산성은 삼국사기에 의하면 궁예가 치악산 석남사를 근거로 여러 고을을 공여하였을 때 이용하였을 것으로 전해지며 신라 문무왕때 축조되었다고 한다. 고려 충렬왕 17년에 원나라의 합단적이 침입하였을 때 항공진사 원충갑이 원주 백성들과 함께 이 산서에서 적들을 크게 물리친 곳이기도 하다. 조선 선조 25년 임진왜란 때에는 김제갑 원주목사가 주민을 이끌고 들어가 끝까지 싸우다가 전사한 곳으로 임진왜란 당시 치열한 격전지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이때 김제갑 원주목사와 그의 부인 전주이씨 아들 김시백이 함께 순절하였으며 그 후 한강 상류의 요진으로 한동안 경영되었다가 폐허가 되었다. 이 성의 전체적인 평면은 삼각형에 가까운 불규칙한 부정타원형으로 산성의 성벽은 동쪽과 서북쪽 일부 구간에 잘 남아 있으나 대체로 붕괴된 상태이며, 전체 둘레는 약 2.4km 정도이다. 옛 기록에 의하면 '영원성은 석축성으로 둘레 3,749척, 성내에 우물 1개, 샘이 5곳 있었으나, 지금은 폐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샘터가 남아 있다. 성안에는 여러 곳에서 건물터가 확인되며, 여러 곳에 성문터가 남아 있으며, 세 곳에 숯가마가 남아 있다. 수습된 유물들은 고려·조선시대에 사용되었던 도자기와 기와류 등으로 그 종류와 수량은 많지 않다


치악산자락에서 걸어보는 역사의 현장

영원산성으로 가려면 치악산 금대분소에서 출발한다. 원주에서 제천으로 가는 5번국도에서 금대계곡을 따라 가다보면 치악산 금대분소가 나온다. 금대분소에서 오르는 치악산은 계곡을 따라 경사가 급하지 않아 걷기에 좋다. 상쾌한 숲의 공기를 느끼며 경치를 즐기다 보면 중간중간 유적비가 나온다. 나무데크로 다듬어진 자연관찰로를 지나다 보면 갈림길이 나온다. 영원산성 방향으로 하늘과 땅을 이어준다는 지천교와 하늘로 오르는 등천문을 지나면 돌담이 정겨운 길이 나타난다. 산 속이라는 것이 무색하게 잘 다듬어져 만들어진 돌담길은 주위의 숲과 어우러져 자연과의 조화를 만들어낸다. 역사의 흔적과 함께하는 산책로는 그 의미만으로도 사람들의 발길을 이끌기 충분하다


영원산성의 수호사찰 영원사

영원사는 남대복 기슭에 위치한 사찰로 문무왕 16년 의상대사가 영원산성을 수호하기위해 지은 절이라 한다. 그뒤 한때 폐허가 되었던 것을 1939년 이계호가 중건하였고, 법당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경내에 창건당시 유물은 없고, 근년에 신축된 대웅전과 삼성각, 요사채가 있다. 근년에 신축된 건물들이지만 고식의 양식을 보이고 있다. 산세가 수려한 곳에 위치하고 있어 경관을 바라보며 잠시 쉬어가기 좋다.

 제7경  

천주교의 성지, 용소막성당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평화의 성지를 만나다


용소막성당은?

이 성당은 풍수원 성당과 원주 성당에 이어 강원도 내에서 세 번째로 건립된 성당으로, 풍수원 성당의 전교회장으로 있던 최석완이 1898년(고종 35) 원주 본당 소속 공소(公所)로 모임을 시작했다가, 1904년(고종 41) 프와요(Poyaud, 表光東) 신부가 초대 본당신부로 부임하면서 독립된 성당이 되었다. 발족 당시 원주군 일부와 평창·영월·제천·단양 등 5개 군에 17개의 공소를 관할하고 있었다. 처음 공소로 있을 때에는 초가였으나 시잘레(Chzallet, 池士元) 신부에 의해 현재의 벽돌 건물로 지어졌다. 시잘레 신부는 신자들의 헌신적인 도움으로 중국인 기술자들을 써서 성당 건축을 시작하여 1년여 만인 1915년 가을에 건평 100평의 벽돌조 양옥 성당을 완공하였다. 후에 일본군에 의해 종(鐘)이 공출되고 한국전쟁 때는 공산군이 창고로 사용하는 등 수난을 겪었으나, 1986년 5월 23일 강원도 지방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풍수지리가 좋은 용소막마을

이성당이 자리한 용소막 마을은 지형지세가 용의 형상을 닮았다고 하며, 현재의 용소막 성당 자리가 용의 발부분에 해당되며 그 뒷산이 용의 머리 형상을 하고 있어 용소막이라고 불린다고 한다. 용소막마을은 전통체험을 활성화하여 관광마을로 발돋움을 하고 있다. 사방으로 둘러싼 산과 정겹게 흐르는 작은 냇가가 조용한 마을을 더욱 아늑하게 한다


100년이 넘는 시간, 용소막을 지켜온 성당

용소막 성당의 역사는 이성당이 만들어진건 1904년으로 성당건립 방식이었던 로마네스크 방식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고 처음에 성당건물은 초가집이 었는데 시잘레 신부(Pierre Chzalle)에 의해 벽돌건물로 지어지게 되었다.

병인박해를 피해 강원도 남부 산간지대로 이주하여 천주교도들이 이지역에 전파 하였으며, 원주본당의 공소로 지정되어 초가 10칸의 경당을 지으면서 시작되었으며, 1904년 포아요(Gaston Poyud)신부가 초대본당 신부로 부임하여 교세 2,000명의 큰 본당으로 발전 하게되고, 1910년 후임인 기요(Joseph uillot)신부가 부임하면서 새 성당 계획을 세우게 된다. 그러나 성당을 세우던 도중 제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귀국한 신부는 1916년 유럽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3대 시잘레(Pierre Chzalle)신부는 중단된 공사를 1914년에 재개하여 묘재 공소의 이석연 회장의 알선으로 중국인 기술자들을 고용하여 지역의 진흙을 사용하여 구운 붉은 벽돌과 타지에서 운반된 목재를 활용하여 건축은 이어졌으나 중국인 기술자의 실수로 인해 기둥이 2자정도 낮아져 상대적으로 가파른 지붕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공사도중 장티푸스를 비롯한 질병이 나돌았지만 1915년 가을 100평 규모의 성당이 완공 되었다.

비록 건축기술과 재료의 부족, 건축인력의 미숙, 경제력의 한계 등으로 본국인 프랑스의 전형적인 성당의 외관중 중앙의 종탑과 아치등 수직성을 강조하는 요소가 주로 채택되고 나머지는 생략되는 표현으로 만들어 졌으나 어려운 여건을 극복하여 이루어낸 값진 유산이라 할 수 있다. 

이시대의 성당건축양식의 일반적인 형태를 지니고 있지만 지붕 꼭대기의 뾰족한 탑이 매우 높은 것이 특징인 아름다운 성당이다.


마음을 정화시키는 성지

보호수로 지정된 수령 150여년으로 추정되는 느티나무 다섯 그루가 성당을 수호하듯 늘어서 있으며 여름에는 시원한 자연그늘을, 가을에는 수북히 낙엽을 흩날리며 성당을 물들인다. 오래된 유적지에서 풍기는 위엄과 성지에서 뿜어져 나오는 정갈한 기운이 일상에 지친 발걸음들에 평화를 준다.

성당 뒤편으로 나있는 길을 따라가면 가을이면 낙엽이 아름다운 길이 있고, 그 길을 따라 고즈넉한 사제관이 나온다. 용소문성당 출신 선종완(라우렌시오)신부님 동상과 유물관이 찾는 이들을 반겨준다. 유물관을 돌아보려면 관람시간이 오전 10~11시, 오후 2~5시, 월요일은 휴무이므로 용소막성당을 둘러보고 싶으시면 시간을 맞추는 게 좋을듯하다. 그리고 유물관 견학은 수녀님께 미리 부탁을 드려야 한다. 시원한 바람소리가 머루는 푸르고 향기로운 솔잎향을 맡으며 타오를듯한 같은 단풍에 취해 잠시 묵상의 시간도 가져보자.

 제8경  

한 폭의 동양화가 펼쳐지는, 미륵산 미륵불상

수석처럼 멋드러진 암봉이 12개나 치솟아 독특한 산세를 나타내며 바위틈을 비집고 붙어있는 노송의 절묘함


미륵산

원주시 남쪽, 충주시 소태면과 경계를 맞댄 귀래면의 미륵산(689m)은 기암 괴봉과 노송이 어우러져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케 하는 산이다. 미륵산은 정상에 거대한 미륵불상이 새겨져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수석처럼 멋드러진 암봉이 12개나 치솟아 독특한 산세를 나타내며 바위틈을 비집고 붙어있는 노송이 그 절묘함을 더한다. 겨울철에는 노송과 암벽에 피어 있는 설화가 일품이다. 산은 그다지 높지 않으나 부드러운 능선길과 아기자기한 암릉길이 조화를 이루고 있어 산행의 정취와 묘미를 느끼게 한다. 정상인 신선대에서 북동쪽을 보면 백운산과 치악산맥이 보이며 동으로는 십자봉이, 남서쪽 멀리로는 남한강 물줄기가 보인다. 신선대 아래의 미륵불상을 지나고 동쪽 능선을 따라 20분 정도 내려가면 황산사이다. 신라 경순왕 때 창건된 고찰이다.


경순왕 경천묘

미륵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는 경천묘는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이 신라가 쇠약해진 틈에 후삼국이 형성되고 고려의 왕건이 세를 키워가자 백성의 안위를 위하여 전쟁을 하지 않고 고려에 평화적으로 정권을 이양한 뒤 전국의 명산을 두루 다니다가 용화산(지금의 미륵산)에 올라 수려한 경관에 반해 그 정상에 미륵불상을 조성하고 그 아래 학수사와 고자암이란 절을 짓고 의탁하였던 곳이다


주포리 삼층석탑

경천묘를 지나 본격적으로 산을 오르다 보면 황산사터가 나온다. 예전엔 큰 절이었으나 세월의 흐르고 지금은 3층석탑과 부도들만이 그 터를 지키고 있다. 황산사는 신라 경애왕 때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는데, 3층석탑은 탑은 기단부(基壇部)가 없이 자연 암반 위에 넓게 깎은 2장의 돌과 그 위에 2단의 굄돌을 놓고, 3층의 석탑을 세웠다. 탑의 몸돌에는 귀퉁이 기둥을 새겨 놓았다. 지붕돌은 크고 두꺼우며, 처마는 받침을 3단으로 만들었다. 3층 지붕돌 위에는 꽃봉오리 모양을 한 큼직한 머리장식이 놓여 있다. 두꺼운 지붕돌에 비해 몸돌이 가늘고 높아 전체적으로 길쭉한 느낌을 주고 있으며,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측된다.


구원의 상징 미륵불상

미륵산 정상 미륵봉 바위벼랑에는 미륵불상이 새겨져 있어 유명하다. 미륵산 정상(해발 689m)의 절벽(높이 15.6m)에 동쪽을 향해 높이 48척의 초대형 미륵이 새겨져있는데, 코의 길이만 해도 사람의 키를 넘을 정도로 가까이에서는 그 모양을 알아볼 수가 없고 멀리서 바라보아야만 형체를 알 수 있다. 예전에는 용화산이라 불리었는데 이후 용화산을 미륵산으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미륵불이란 미래 인간 세상에 내려올 부처를 일컫는다. 미륵불이 내려와 만드는 세상은 물이 거울처럼 맑고 깨끗하며, 곡식이 풍족하고 인구가 번창하며, 사계절이 순조로워서 질병이 없고 사람들의 마음이 평화롭고 서로가 즐거워하는 이상적인 세상이다. 이를 기원하는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마을과 산천의 이름에 미륵을 붙이고, 미륵불상을 조각해 세우면서 미륵 세상을 꿈꾸었으며 하루라도 빨리 미륵불이 세상에 내려와 힘겨운 자신들을 구원해주길 갈망했고 그 갈망했던 모습이 미륵불에 담겨져 있다. 전설에 따르면 미륵불상은 신라의 56대 마지막 임금 경순왕의 초상으로 알려져 있고 미륵산은 경순왕의 애환이 서린 산이라고 전해져 온다. 

또 미륵불의 코를 만지면 소원을 성취한다는 전설도 있다. 요즘에는 미륵산 실제 정상인 695.6m봉으로 직등하는 코스가 인기를 얻고 있다. 부드러운 능선과 아기자기한 암릉이 조화를 이룬 미륵산은 수도권 에서 두시간 정도의 거리에 있어 사람들이 부담 없이 찾을 수 있는 산이다. 미륵산은 그 이름처럼 온화한 산세를 갖고 있어 주위에 사찰과 농원등의 볼거리도 많다. 가는 길에 보이는 커다란 느티나무들은 마치를 마을을 지키는 수호령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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