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cember 15th, 2017 Fri

[기타] 눈 오는 해, 풍성한 해

in Category 여행

글쓴이: 산들무지개

한국 지인들은 우리가 사는 곳을 참 부러워한다.

"저 푸른 초원 위의 그림 같은 집~!" 이라는 노래 구절을 부르면서 예찬하다 못해, 우리가 어릴 때 보던 [초원의 집] 시리즈를 연상하듯, 드라마 속의 환상적인 장소로 재해석하는 사람도 가끔 있다. 그렇게 현대를 사는 사람들은 '어쩐지' 도시에서는 미처 경험하지 못한 전원적인 삶을 동경하며, 상상하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해발 1,200m의 우리 [참나무집]은 여러 사람이 부러워하는 곳 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런데 실상은?

실상은 모든 이들이 다 그렇듯이 새로운 것에 익숙해지면 평범함이 되고, 평범함 속의 연속되는 일들은 그저 하나의 연속된 일상에 불과하다. 그래서 이곳에서도 하기 싫은 일이 생기고, 처리해야 할 일들이 미루어지고, 미리 처리하지 못한 일들은 스트레스로 쌓이기도 한다. 그렇게 어디나 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슷하다. 시골은 도시보다 사람 손이 가는 잔일이 많고, 또 도시보다는 복잡하지 않은 단순함이 있다. 그 단순함 중에는 엄청난 괴력을 자랑하는 자연에 맡기는 일도 있다.

시골에서는 날씨에 민감해지고, 계절에 민감해진다는 말이 맞을 정도로 우리는 단순하게 보이는 자연에 상당히 의지하고 있다.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추우면 추운 대로, 눈이 오면 눈 오는 대로...... 그렇게 익숙하게, 민감하게, 그리고 단순하게 자연을 맞이한다.

겨울을 맞기 위해, 우리 부부는 월동준비를 일 년 내내 한다. 특히 장작 난로를 쓰는 이곳 특징에 맞게 사계절 마른 장작을 패대고, 말린다. 그렇게 쌓여가는 헛간의 장작은 쌀독에 쌀이 가득 쌓이는 만큼이나 풍족한 만족감을 준다. 일단 우리의 어린 세 딸이 추위로부터 안전하다는 안전감이랄까? 오~! 현대를 사는 지금 이 시대에 우리는 도대체 어느 오지의 제삼세계에 사는 것일까? 오지도 아닌 유럽의 스페인이라는 나라에서 장작을 생각할 정도면 정말 심각한 정도가 아닐까, 이 글을 쓰는 나는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다.

한번은 겨울에 엄청난 눈이 내린 적이 있었다.

눈 오면 기분이 좋아지기 마련인데, 자연이 그렇게 많은 눈을 한꺼번에 쏟아낼 수도 있을까 싶을 정도로 지붕이며, 처마며, 차며, 길을 다 막아버린 적이 있었다. 그때는 낭만 가득한 그 기분이 갑자기 변하여 두렵기까지 했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고립이라는 단어가 딱 들어맞은 적이 이때가 처음이 아닐까 싶었다.

우리 아이들은 그저 눈이 온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환호를 질러대고, 우리 부부의 속은 아는지 모르는지 창밖으로 눈 오는 풍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이럴 때는 두려움을 떨쳐내기가 무섭게 나는 아이들에게 줄 튀김을 해댄다. 일단 먹고 다음 상황을 점검하자, 라는 심리로 말이다. 이게 정신건강에 매우 좋다.  

그 해는 눈이 매우 많이 내려 우리 집은 눈 속에 갇혀버리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모든 통신은 두절되고, 눈은 사흘 내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퍼부어댔다. 참으로 다행인 것이 비상식량과 월동 준비하면서 저장한 음식이 있었다는 것이다.

밖으로 나갈 수도 없고, 안으로 들어올 수도 없는 사정이었으니 정말 심각했다. 남편이 겨우 눈을 뚫고 장작 창고에 갔다 오는 것이 다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외떨어진 이곳이 이때는 세상의 모든 중심이 되어버린다. 아무도 간섭할 사람 없고, 신경 쓸 사회적 요소가 없으니 말이다.

그러다 눈이 마침내 멎고 평화가 하얀 눈 위에서 속삭일 때면 햇살이 반짝이며 천국이 이곳인가, 싶을 정도로 아름답다. 때마침 스페인 경찰에서 농가의 안전 확인차 전화라도 오면 이제야 살았다는 느낌이다.

"우리 가족은 무사합니다. 대신 식수가 좀 부족합니다."라고 남편이 통화에 응할 때 엿듣다 나는 소리를 질러댔다.

"쌀이 부족해요~!"

쌀이 부족하다니?! 내 입에서 나온 말이 ‘쌀’이다. 고립된 외지에서 심리적 안정감을 주는 것은 역시 쌀인가 보다. 내 한국인 근성을 어찌 없앨 수가 있을까? 이 소리를 듣던 남편은 웃으며 경찰에게 그런다.

"하하하! 제 아내가 한국인이라 쌀이 있어야 든든한가 봐요."

갑작스럽게 내린 폭설에 우리는 자연의 위대함을 언제나 깨닫고, 그 위기 후 찾아오는 평화에 안도한다. 그리고 이 폭설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생각한다.

스페인에서는 겨울에 내린 폭설은 다음 해, 풍성한 한 해를 장식한다고 한다. 폭우처럼 모든 것을 휩쓸고 가는 것이 아닌 폭설은 천천히 눈이 녹아내리면서 땅으로 스며들고, 오랫동안 수분을 머금으며 봄이 올 때까지 땅을 촉촉하게 한단다. 겨우내 얼었던 씨가 그 수분을 머금고, 봄에 싹을 틔울 때 폭설 덕분에 풍성하게 자라난다고 한다.

나에게도 폭설은 같은 의미다. 겨우내 깊어가는 내 마음의 양식이 조금 겸허함으로 자라나지나 않을까 싶다. 한꺼번에 큰 위기를 겪었지만, 우리는 언제나 그 위기 후에 찾아오는 평화와 안정을 깊이 경험하게 된다. 그것이 진정 자연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이며, 천천히 마음이 발전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그렇게 우리의 참나무집 겨울은 올해에도 깊어만 간다.  

Vol 26 of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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