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ril 28th, 2017 Fri

[경북 경주시] 천년의 이야기꾼 - 경주

in Category 여행

새 풀이 돋아나듯

초록이 물처럼 번지는

아름다운 경산 반곡지서

비 내리는 신라의 밤

귀인을 맞이하던

반짝이는 임해전지를 지나

왁자지껄 성동시장 위로

다시 깊어지는...

천년고도의 숨소리

신라의 달밤, 아니 경주의 달밤을 보는 게 이리도 서럽도록 힘이 든단 말인가. AD 8세기 경 바그다드(메소포타미아), 장안(당), 콘스탄티노플(동로마)과 함께 세계 최대 도시 중 하나였던 경주를 찾은 것은 때마침 보름이 갓 지난 날이었지만, 나는 끝내 경주의 달밤을 볼 수 없었다. 이미 벚꽃도 모두 사라져버린 보문호엔 별빛과 달빛 대신 차가운 봄비만이 종일 내렸다. 눈물과 곧잘 비견되는 서글픈 봄비는 이 땅의 슬픔을 알고 있기라도 한 듯 경주의 하늘과 땅을 길게 한줄로 잇고 있었다.

신록이 아름다운 반곡지

경주로 내려가는 길, 경산 반곡지에 먼저 들렀다. 어두컴컴한 하늘만큼 까맣게 타버린 마음에 새풀이 돋아난 연두빛을 덧칠하고 싶었던 까닭이다. 원래는 반곡지의 명경같은 반영을 보려면 새벽에 가야하지만 서울에서 출발한 터라 점심 쯤에야 반곡지에 닿았다. 오월의 신록으로 유명한 반곡지. 저수지의 규모는 작지만 그 명성은 대단해 늘 사진작가들이 몰리는 곳이다(반영을 좋아하는 이들은 의외로 많다).

스타워즈의 로봇군단처럼 제방에 길게 늘어선 삼각대의 행렬이 없어서 좋았다. 대신 물이 찰랑하니 여린 초록의 그 반영이 깨져 물과 함께 흐른다. 아무래도 좋다. 회색과 강철로 구성된 대도시 서울에서 온 나는 고꾸라져 물에 맞닿은 연둣빛 왕버들만 봐도 속이 모두 깨끗해지는 것이 마치 식중독에 걸린 뒤 위세척이라도 한번 세게 받은 듯하다.

이리저리 거닐다 반곡지를 빠져나올 때 좁은 길에서 트럭 하나를 만났다. 한 사내가 고개를 빼꼼히 내밀더니 말한다. "나무 사진 찍었걸랑 사진 몇 장만 보내주오". 정중했지만 꽤 당당하다. 무슨 소린가 한참 쳐다봤더니 "뭐 제일 좋은 거 말고 덜 좋게 나온거..." 머쓱했는지 사십 줄의 사내는 말끝을 흐렸다. 그래도 긴 이메일을 또박또박 불러주면서 검정 비닐 봉지를 건넨다. 봉지에는 아직 김이 나는 큼지막한 두부가 한 모가 들어있다. 두부보다는 천연덕스런 그 마음이 더 따뜻해 꼭 보내주겠고마 약속하고 돌아섰다. 낯선 곳에서 좋은 풍경을 보고 낯선 사람에게서 좋은 마음도 느끼고, 그래 여행의 즐거움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눈물같은 봄비 내리는 천년수도 경주

경주는 그 자체가 보유한 역사, 문화적 의미에 많이 가려 있지만 사실 그 풍광 만으로도 무척 아름다운 곳이다. 너른 벌판에 우뚝 솟은 남산과 토함산, 수려한 호반의 정취를 자랑하는 보문호, 둥글둥글한 대릉원과 오릉에 돋아난 새파란 잔디가 연출하는 비현실적인 풍경이 곳곳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게다가 좀전까지만 해도 온통 꽃비내리는 벚꽃 터널로 휘휘 감은 곳이라니. 국내 최초로 개발된 관광단지란 명성답게 과연 명불허전이란 찬사가 나온다.

그러나 역시 경주에 오면 역사의 어느 한 자락까지 생각이 거슬러 오른다. 경주하고도 보문단지에 접어들었을 때 문들 '찬가파랑가'가 떠올랐다. 맞아 그런게 있었지. 삼십년 가까운 아련한 학생시절 고전문학이던가, 국사책에선가 본 찬리파랑가. "셔벌발기다래 밤드리 노니다가..."로 시작하는 처용가와 "아으 미타찰애 맛보올 내 도닷가 기드리고다"하던 제망매가는 어렴풋이 기억에 남았지만 '찬가파랑가'는 도무지 한 구절도 떠오르지 않는다. 다만 기파랑이란 화랑을 추모하던 노래란 것과 아주 차지게 허벅지살에 묻어나던 선생님의 회초리만 떠오른다.

어쨋든 실체가 모호한 '찬기파랑가'의 기억은 수학여행 참사라는 현실적 상황과 뒤섞여 대뇌피질 속에 오랜시간 묻어놨던 수많은 기억을 순식간에 소급했다.

나는 이십칠년 전 이맘때 서울 서부역 뒤에서 새벽 기차를 타고 이곳으로 수학여행을 왔고 그 땐 분명히 '찬기파랑가'를 외우고 있었다. 숙소에서 주던 카레와 된장국은 지금 생각해도 형편 없었고 다만 누군가 가져온 통조림은 굉장히 맛좋았다. 최근 고교 동창생에 SNS 에 올린 사진에는 부모님께서 사주신 유명 브랜드의 티셔츠를 입고 첨성대를 배경으로 친구들과 한바탕 웃고 있는 내 모습이 선연하게 남아있다. 기억의 꼬리는 서로 맞물려있다. 그래서인지 "열치매 나토얀 닥리 힌구름 조초 떠나간 안디하..."어쩌고 하던 나머지 귀절과 시험문제의 사지선다형 중 정답이던 '3번 충담사'까지도 생각나 버렸다.

곰곰 생각해 보니 '찬기파랑가'란 글귀는 무심코 찻길을 지나다 본 것이겠다. 마침 지난 달 초부터 경주세계문화엑스포 공연장에서 뮤지컬 '찬기파랑가'를 상연하고 있었다. 아마도 공연을 알리는 플래카드에서 봤다 보다. 

▶ 임해전지(안압지)의 야경은 명경같은 물에 비쳐 두배의 기쁨을 준다

아아 신라의 밤이여

달은 비록 보지 못했지만 비내리는 밤 임해전지의 근사한 야경은 두눈에 똑똑히 담았다. 안압지야 많이들 알고 있지만 임해전지는 다소 낯설다. 사실 두 이름은 한 곳을 가리키는 말이다. 글로벌 국제 사회였던 신라의 왕이 외국의 사절을 맞을 때 바다에 나가야 했지만 그렇지 못할 때가 많아 월궁 옆에 잔잔한 바다를 본뜬 임해전지를 지어놓고 마음으로 성의를 대신했다는 곳이다.

아주 그럴 듯하다. 진정성이 느껴진다. 멋진 정원을 꾸며놓은 서유럽의 궁보다 낫다. 천년도 넘는 그 옛날에 이처럼 최고의 시설을 지어놓고 해외 귀빈을 맞았다니 이를테면 누리마루 APEC 하우스 급 마이스(MICE) 컨벤션 시설이 아닌가.

이후 조선시대에는 신라를 부정하며 임해전지를 그저 '기러기와 오리떼가 노는 저수지'로 편훼했다. 그러니 안압지 대신 임해전지라 불러야 마땅할 것이다. 임해전지는 낮에도 근사하지만 사실 밤에 가면 더 좋다. 조명을 받아 보석처럼 빛나는 화려한 야경이 명경같은 수면에 고스란히 비쳐 2배의 즐거움을 준다. 산책로도 좋다. 당장 뛰어들고 싶은 물을 끼고 아름드리 나무 아래를 지나다 영화 세트장처럼 비현실적인 대숲과 계곡을 만난다. 여기다 초롱불까지 하나 들고 신라의 밤을 만끽한다면 이보다 더한 호사가 없다.

경주는 시내구경도 즐겁다. 경주 시민들은 한때 세계 최고 국제도시의 시민답게 자부심이 강하다. 또 유교 양반문화와 '최부자'로 대변되는 부유층 문화까지 간직한 곳이라 도시적 문화에도 깨알같은 재미가 있다.

경주 성동시장은 젊은 층이 좋아하는 여행지다. 먼저 참기름집을 찾아가 기름 한 병을 짰다. 성동시장에 오면 누구나 그렇게 한단다. 문어와 돔베기 등 제사떡과 제수음식을 파는 특별관에서 골목을 돌아서니 바로 패션관. 다양한 옷가지와 이불, 주단을 파는 가게들이 즐비하다. 맛있는 냄새를 쫓아 골목을 도니 튀김과 떡볶이, 순대, 김밤 등 맛난 먹거리가 그득해 장구경의 즐거움이 새록 살아난다.

압권은 바로 한식뷔페다. 뷔페라 해서 특별한 것은 아니고 좌판에 앉아 30가지 가까운 반찬을 마음대로 덜어서 먹는 형식이다. 앉으면 바로 밥과 국이 나오고 나물과 전, 고기, 장아찌 등 반찬은 덜어먹으면 된다. 내로라하는 관광지에 와서 6000원을 내고 앉아 먹는 밥상이 이리도 맛있을 수가 없다. 관광도시란 명성은 괜히 붙은 게 아니다. 

▶ 저렴하면서도 푸짐한 성동시장 한식뷔페 (왼쪽), 성동시장의 참기름은 워낙에 유명해서 참기름을 짜서 가는 사람도 많다(오른쪽)

둘러볼만한 곳

경주에선 생각나는대로 가는 곳이 정해진다. 바다가 보고싶을 땐 감포로, 소나무숲이 보고 싶을 때는 삼릉이나 흥덕왕릉으로 가면 된다. 문화역사지구는 두말할 것도 없다. 신라의 유적 뿐 아니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한국의 역사마을)으로 지정된 양동마을과 퇴계의 옥산서원, 독락당 등 영남 유교문화를 만날 수 있다. 생각보다 더울 때는 교육문화회관 윗쪽 블루원리조트(www.blueone.com/waterpark)에서 워터파크를 즐기면 된다.

먹거리

보문단지 내 '화산운수대통한우가든'이 북군동으로 옮겨 더욱 넓고 찾기도 편해졌다. 원래 화산불고기단지에서부터 갈빗살과 등심이 맛있는 곳으로 소문난 곳이다. 경북의 우수한 한우가 충남의 젓갈과 만난 상차림도 하나하나 면면이 훌륭하다. 서산 출신 여사장이 직접 어리굴젓과 갈치속젓 등 젓갈을 가져다 차려낸다. 어느 것 하나 젓가락이 가지 않는게 없다. 압권은 바로 밥이다. 작은 개인솥에다 직접 해주니 언제라도 갓지은 밥과 누룽지로 마무리를 할 수 있다. 경주 보문로 441 (054)763-6767

경주 지역 음식 중에 '짜글이'라는 것이 있다. 고깃덩이를 매콤한 양념과 함께 짜글짜글하게 지져먹는다는 뜻이다. 원래는 가정에서 반찬으로 해먹던 것인데 관광객들도 사먹을 수 있는 곳이 몇 군데 생겼다. 이중 동천동 부호탕 인근에 위치한 박통뒷고기참숯구이는 돼지고기의 여러 맛있는 부위를 푸짐하게 즐길 수 있는 '뒷고기'를 먹고난 후 짜글이찌개로 2차까지 즐길 수 있다. 같은 술집 내에서 '2모작'을 할 수 있다는 얘기다. 짜글이찌개는 굴물과 함께 진한 양념이 밴 진한 맛의 고기를 안주삼아 술이나 밥을 먹기에 딱이다. (054)748-1248

잘곳

국내 최초 관광특구인 경주 보문단지에는 최고급 호텔과 리조트들이 밀집되어 있다. 이중 대명리조트는 보문호가 한눈에 내려보이는 최적의 위치에 있다. 대명리조트 경주는 7월17일까지 '보문호 패키지'를 선보인다. 패키지는 2인 기준 객실 1박, 조식, 아쿠아월드, 테디베어 입장권, 버드파크 입장권을 하나로 묶어 18만 1000원부터 판매(주말 제외)한다. 1588-48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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